여전히 모르겠는 게 하나 있다. 제대로 자리를 잡고 두 손을 모으고 무릎까지 꿇고 드리는 기도, 그리고 혼자 산책을 하거나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조용히 묵상을 하다 잇따르는 생각과 기도의 차이를. 무엇이 제대로 된 기도인지, 생각 끝에 이어지는 기도를 기도라고 할 수 있을지.
정식으로 준비하고 드리는 기도는 확실히 더 경건하다. 몸도 마음도 준비 상태만큼 경건해진다. 대신 자꾸 무언가를 바라게 된다.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이렇게 해주시옵소서, 저렇게 해주시옵소서를 외치게 된다. “제 마음의 불안과 분노를 걷어내 주세요.” “아이들 걸음걸음마다 주님의 은총을 함께 해주세요.” “아내가 아프지 않도록 해주세요.”
이와 다르게 산책길이나 출퇴근길에, 혹은 모두 잠든 새벽녘 거실에서의 기도(?)는 가볍다. 머리에 떠오르는 문장, 이미지를 중얼거리다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기도(또는 묵상)는 자꾸 성찰하게 만든다. 무언가를 갈구하고 바라지 않는다. 그저 하루의 일상을 돌아보고, 내 마음을 돌아보고, 내 믿음을 돌아보게 한다.
그래서일까. 친하게 지내는 회사 후배가 책을 건넸을 때, 책 표지의 설명 문구들이 마음에 착 달라붙었다. 후배는 책을 주면서 그랬다. “책 내용이 선배랑 잘 어울릴 거예요.” 제2대 유엔 사무총장을 지냈고, 사후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다그 함마르셸드(Dag Hammarskjold)의 <이정표>는 아쉽게도 술술 읽히는 책이 아니다. 일기인데다, 전후좌우 설명 없이 이어지는 문장과 문장, 때로는 시에 가까운 상징 단어들은 많은 걸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추운 나라, 스웨덴에서 나고 자란 탓인지 함마르셸드는 야영, 등산을 즐겨했다. 책에 담긴 여러 장의 사진에는 크레바스를 건너 빙산을 오르는 모습도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하게 걸으며 사색하고 묵상하고 주님에게 더 다가가는 장면처럼 보인다.
함마르셸드는 1961년 9월 아프리카 콩고 내전 사태를 해결하려고 현장으로 가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노벨위원회는 그해에 죽은 이에겐 노벨평화상을 주지 않는 관례를 깨고 그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국제평화에 헌신한 그의 공로를 기린 것이다. 제7대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은 그를 ‘유엔 사무총장직의 기대와 기준을 세운 인물’이라고 했다.
함마르셸드가 죽은 뒤에 <이정표>라는 제목의 원고가 뉴욕 자택에서 발견됐다. 일기 형식으로 기록된 원고에는 함마르셸드가 함께 봉인한 편지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글들을 가리켜 “유일하고도 진실한 나의 모습을 그려낸 단 하나의 기록”이라고 표현하면서 “나 자신과의, 그리고 신과 나 사이의 협상에 관한 일종의 ‘백서’”라고 평했다. 왜 협상이라고 했을까. 이건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도 한참을 고민할 지점이었다. 대략의 의미가 머릿속에 그려지지만, 아직도 글이나 말로 정리되지는 않는다.
다만, 함마르셸드도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혼자 공책 앞에 앉은 그는 시끌벅적한 세상과 늘 흔들리는 자신과 세상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떠올렸을 것이다. 함마르셸드가 유엔 스웨덴대표부의 단장으로 있던 1952년 어느 날에 쓴 문장들은 인간적인 내면을 보여준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너는 때때로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운명을 돕는 척 소소한 시도를 했고, 심지어 그것을 남들 앞에서 가장 명분으로 포장하려 했던 적도 있었다. … 길이 어디로 이어지든 겉보단 속을, 세상보다 영혼을 우선하라.”
함마르셸드의 <이정표>를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하릴없이 길을 걸으면서도, 사람들과 식사를 하며 쓰잘머리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세속의 일상이 끊임없이 밀려와 자꾸 무너지면서도, 고백과 회개와 반성을 놓지 않는 게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이지 않을까. 책을 덮으면서 걸음마다, 손짓마다,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주님의 향기가 가득하기를 기도했다.
사족: 이 책에는 글이 쓰인 시점, 배경, 인용 성경 구절, 문학 작품 등 맥락을 설명하는 42쪽 주석이 별도로 있다. 주석을 들춰보면서 함께 읽으면 더 좋다.
✎김찬희 집사(4남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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